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합중국 육군/군사경찰 (문단 편집) == 역사 ==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이 사고치는 일이 심심치 않게 터졌기 때문에 군사경찰의 역사는 곧 군대의 역사다. 미 육군 군사경찰 역시 [[미국 독립 전쟁]] 시절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군사경찰감 보직 설립을 건의한 게 다름 아닌 [[조지 워싱턴]]. 대륙의회는 건의를 받아들이고 1776년 1월 최초의 대륙군 군사경찰감에 월리엄 마로니(William Maroney)를 보임한다. 그러나 당시의 대륙군도 규모가 상당했기에 군사경찰감이 혼자 근무하는 걸로는 규율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고, 마로니는 다른 부대 인원들을 급한대로 파견받아 군사경찰로 써먹지만 파견자들로 부대를 정상 운영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1778년 5월 20일 대륙의회는 군사경찰대(Marechaussee)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6월 1일 바톨로뮤 폰 히어(Bartholomew von Heer) [[대위]]를 군사경찰대장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군사경찰대가 나가서 죄지은 군인들을 잡아오면 군사경찰감이 그들을 구금하고 처벌하는 형태가 정착된다. 전투지역에서는 교량 경비, 주력 부대의 후위와 측면 경계, [[탈영]]병 검거 등의 임무를 수행했고 그러다가 교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미국]]이 독립하자 대륙군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Marechaussee는 1783년 11월 해체되고 기존의 장병이 사고를 치면 소속 부대에서 처벌하는 방식으로 군형사사법체계가 환원된다. 그러나 수십 년 후 미국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자 군사경찰대는 부활하게 된다. [[남북전쟁]] 발발 후 북군은 군사경찰대를 부활시키지만 충분치 않자 예비역 군사경찰대(Veterans Reserve Corps)까지 조직해 후방지역을 맡겼다. 전쟁이 끝나자 연방군은 군사경찰대를 다시 해체시킨다. 그 다음 군사경찰대의 부활은 1901년 [[미국-스페인 전쟁]]. 전쟁터가 해외였기 때문에 해외 주둔군, 그 중에도 본토와 거리가 멀어 병력관리가 힘들던 [[필리핀]]에 투입되었다. 1905년 2월 17일에는 필리핀 경찰학교가 설립되는데 본래는 반란군을 억제하고 미군 병력에 대한 군사경찰 임무를 수행할 인원 양성이 목적이었으나 이후 미군이 손을 뗀 뒤에도 필리핀 정부가 자체적으로 계속 운영해서 지금은 필리핀 경찰청의 경찰학교로 굴려지고 있다.--미국의 유산-- 전쟁이 끝난 후 또 해체되었던 군사경찰은 [[1차대전]]에 미군이 개입하는 것이 확정되자 1917년 전쟁부(지금의 국방부)에 의해 부랴부랴 다시 조직된다. 가장 먼저 군사경찰대가 창설된 부대는 '''Big Red One'''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제1보병사단. 1917년 7월에는 후속조치로 군사경찰감실이 설립되고 1918년에는 원정군사령관 [[존 퍼싱]]의 명령으로 군사경찰조직들이 군사경찰감실에서 분리되어 각각의 부대가 된다. 퍼싱은 이후 군사경찰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프랑스]]에 군사경찰훈련기관을 만드는 등 육군 군사경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전후 결국 폐쇄되지만. 당시 군사경찰감이었던 해리 힐 밴홀츠(Harry Hill Bandholtz) [[준장]]이 --계속되는 루프를 깨닫고--군사경찰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할 것을 건의했지만 연방의회에서는 1920년 제정된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에 기존의 군사경찰부대들을 해체하지 않다고 명시하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또 평화로운 수십 년이 흐르고, [[2차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은 또다시 캠프 고든, 포트 벤자민 해리슨, 포트 멕헨리 등에 군사경찰훈련기관을 설립한다. 그래도 기존 군사경찰부대들 덕분에 늘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군사경찰들이 금방 자리를 잡았고 그만큼 활약도 많았다. 특히 과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쏟아져 들어온 전쟁포로들을 큰 사고 없이 관리한 것은 군사경찰의 큰 공로였다. 1944년에는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가 완전히 군사경찰에서 분리되어 나가면서 오늘날처럼 군사경찰과 수사기관이 분리되었다. 49년, 전쟁부가 해체되고 그 자리를 꿰찬 [[미합중국 국방부|미국 국방부]]는 전쟁이 끝났으니 군사경찰대를 해체시키려 했다. 그러나 --역시 계속되는 루프를 깨달은-- 연방의회가 이를 무시하고 1950년 5월 육군조직법(Army Reorganization Act)을 제정하면서 군사경찰대는 무사히 자리를 지키며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누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은 다시 전시태세가 되었다... 한국에도 [[미군정]] 시절 질서 유지를 위해 주둔하던 캠프 에스컴의 55군사경찰중대를 비롯해 일부 군사경찰부대가 있었으나 전쟁을 수행하기엔 택도 없었기에 일본에서 많은 주일미군 군사경찰부대가 파견되었다. 이들의 가장 큰 임무는 보급로 유지 및 경계와 포로 관리였다. 기존에는 직접 전투에 개입하진 않았지만 미 육군 군사경찰대는 한국전쟁과 10년 뒤 [[베트남전]] 당시 [[구정 공세]]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전투도 수행하는 부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